전시 《바흐티노프 마스크》 평론


불가능성, 그것은 비극일 필요가 없다

이소임


간혹 미디어에서 포식자와 피식자 관계의 존재들이 평화롭게 상생하는 걸 보고 연출된 게 아니냐며 의심한 적이 있다. 또 언젠가는 비극의 구렁텅이에 빠져 뒷걸음질 치는 찰나, 우연히 모든 것을 바꿀 가능성의 순간에 가닿게 된 묘한 경우도 있었다. 돌이켜보면 나는 어떤 현상을 마주하거나 무언가 판단 내려야 할 때 그 가운데에 보이지 않는 선을 긋고 긍정이 곧 옳은 선택이라 믿어왔던 것 같다. 후기 자본주의가 지배적인 구조로 정착된 후 작금에 이르는 이 물신(物神)의 시대에 이런 이분법적 사고방식은 어떤 현상을 더 빠르고 합리적으로 해석하도록 돕지만, 일부를 가리는 장치가 되기도 한다. 편리에 따라 그것 중 하나를 취사선택하거나, 심지어는 아예 처음부터 하나만 존재했다고 여기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손익의 논리구조에서 떨어져 나와 현상을 볼 때, 그러니까 부정과 긍정의 항이 서로 간 우위를 점하거나 배척하지 않고 공존하게 될 때. 비로소 우리는 부정의 형식 역시 어떤 ‘존재(存在)’로서 생각해 볼 수 있지 않을까.

《바흐티노프 마스크 Bahtinov Mask》를 관통하는 감각은 가능성과 불가능성, 활용과 의존, 현재와 역사 같은 양가적 기제다. 정지현과 이진영 두 조각가의 이미저리는 동시대에 마주한 여러 차원의 양가성과, 그에 대응하는 사물들을 엮어 아이러니컬한 문맥을 구사했다. 첫 번째 전시공간에서 가장 먼저 관객을 맞는 이진영의 <리튼 인 스톤>(2023)은 이질적인 시간의 경험을 제안하는 듯 보였다. 언뜻 오래된 비석의 형상을 갖춘 이 조각은 제목의 권위적 함의에도 불구하고 레진과 폴리스틸렌이 뿜어내는 가소성, 그 희고 반짝이는 물성으로 하여금 그것이 딛고 있는 시간의 차원이 깊지 않음을 알게 했다. 언젠가 작가는 초기 작업이 “존재 가치에 대한 질문”에서 출발한다고 했는데 비석의 사방에 빼곡히 새겨진 글귀는 그가 ChatGPT와 존재의 근원이라는 본원적인 주제에 대해 주고받은 대화를 글의 형태로 편집하고, 이를 다시 이모지(emoji)로 번역한 결과다. 몸 없이도 가능한 인공지능과의 대화는 이모지라는 일종의 기호를 통해 재의미화되는데, 다양한 의미를 가로지르며 이동하는 얇은 기표들은 ‘아름다운’ 표면 위로 물화되어 사유의 깊이를 차단한다. 고립, 절단된 물질적 기표들이 어느 한 곳에 정박하지 못한 채로 다수의 시간을 표류할 때, 우리는 존재에 대한 온전한 이해가 불가능함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이진영이 대립항의 물성을 뒤섞는 방법론을 통해 전시장에 교란된 시간을 연주했다면, 정지현은 사물과 인간이 맺는 이중적 관계를 주제로 직접 들여왔다. 전시장 입구로 들어서는 관객을 일제히 주시하는 구도로 설치된 정지현의 검은 조각(<Bust>, <Mermaid>, <Crunch>(2023))은, 등신대 크기로 각각 ‘흉상’, ‘좌상’, ‘와상’ 등 인체 조소의 분류 명칭을 부제로 삼고 있어 그것이 인간의 외관을 묘사한 것임을 알게 한다. 재료로는 해먹 스탠드, 우산, 심지어 콜라 페트병 등 우리가 흔히 사용할 법한 일상 사물과 지팡이, 보행기, 의자 등 인간의 몸을 물리적으로 받쳐주는 기능적 사물들이 눈에 띄었다. 사물들은 다양한 단위로 해체되었으며, 단위 간의 일관된 연계성은 전혀 찾아볼 수 없는 느슨한 결합을 취한다. 인간이 “기계화된 포유동물”이 될 것이라 보았던 버틀러의 경고가 실현된 것일까?* 실제로 스마트폰은 우리의 팔다리를 대신해 세계 여러 곳을 횡단하고, 대도시 곳곳을 누비는 자동차, 전기 같은 기계들은 확장된 인간의 몸이라고도 볼 수 있을 테다. 그런데 정지현이 묘사한 사물화된 인간의 모습을 보는 경험은 어딘가 모르게 불편하다.

정지현의 인간 군상을 보며 떠오르는 아도르노의 문장이 있다. “주변의 사물이 가장 내밀한 신경에까지 미치는 영향을 자각”하라는 경고다.** 아도르노는 기계는 그것을 사용하는 사람들의 행동을 제한하는 형식으로 작동되기 마련이며, 그러한 점에서 경험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잔영”, 즉 깨달음이나 교훈을 남기지 않는다고 했다. 그의 말대로 오늘날 사물에 대한 우리의 의존은 실로 심각한 수준이다. 그런 점에서 정지현이 그리는 인간상은 다만 사물과 결합한 포스트휴먼(posthuman)이 아니다. 사물에 잠식당해 사물 그 자체가 되어버린 몸은 완결하기보다 조악해, 오히려 본래 사물의 용도 중 무엇도 가능하지 못한 상태가 되었다. 인간과 사물 간 위계가 역전된 상황은 같은 작가의 <Mermaid>(2023)에서 직접적으로 드러난다. 인어는 반인반수의 모습을 한 상상 속 생물로 동서양의 설화에서 자주 등장해왔는데, 우리가 이 도상에 대해 느끼는 친숙함과 공포는 정지현의 조각이 환기하는 상반된 감정들과 닿아 있다.

전시구성에서 흥미로운 점은 두 번째 전시공간인 ‘옹노’ 입구에 반인반수의 도상이 반복 배치되었다는 것이다. <Siren>(2023)이 그것으로, 이번엔 세이렌으로 그 모습을 탈바꿈한 사물은 심지어는 바닥에 드러누운 불순한 자세로 전시장에 들어서는 관객을 향해 손짓한다. 그러나 세이렌의 유혹에 취해있는 것도 잠시, 가까운 거리에서 이진영의 <무제>(2023)가 당신에게 은근한 시선을 보내고 있다는 걸 깨닫게 된다. 비로소 옆을 돌아보게 된 나는 반인반수 도상에 대응하듯 화면의 절반이 검게 탄 하트 이모지 부조 구석구석을 찬찬히 눈에 담다가, 이윽고 거울 타일에 비친 내 모습을 마주하게 되었다. 이런 작가의 위트는 그들이 펼쳐내 보이는 사물의 이중성이 그다지 위협적인 것으로만 느껴지지 않게 한다. 이들은 지금의 상황에 대한 심각성에 대해 경고하기보다, 동시대 감각이란 이쪽 혹은 저쪽에 대한 선택이 아닌 포용에 있다고 풀어 설명해 주는 것 같다.

그런 점에서 나는 정지현의 아상블라주(assemblage) 방법론이 이런 동시대 현상의 양가성을 표현하는 탁월한 조형 방식이라 보았다. 그의 조각 재료가 된 사물들은 원래의 용도로서의 사용자의 경험과 기억을 끌어와, 그 미묘한 자장으로 서로를 당긴다. 조립된 다중적 결합체로서 그 내부에는 서로 다르면서도 닮은 느슨하지만 동시적인 ‘관계’가 존재하는 것이다. 사유방식의 틀로서의 조립은 연결, 관계와 같은 개념들을 은유하면서 결국 세계를 사물과 인간의 관계로 보는 작가의 의도와 닿아 있다. 부분 혹은 전체가 아닌 요소들 간 상호 관계에 의해 구축된 몸은 유일무이하거나 절대적이기보다 구성하는 물질 간 관계에 의해 다르게 규정된다. 그런 의미에서 사물은 무엇을 가능하게도, 불가능하게도 하는 유기체다. 하나의 몸 안에서 서로 다른 사물이 공존하는 방식은 모종의 가능성을 열거나 닫는 다양한 방식으로 작동한다.

전시 동선상 종착지인 옹노 2층 다락방에 도달하면 앞서 이진영이 초입에서 풀어내 보였던 시간성과 다시 한번 마주하게 된다. 정지현의 두 작품 사이를 가로지르는 거대한 시멘트 덩어리 <파도 이모지>(2022)가 그것이다. 이 작업에서 이진영이 차용한 이모지는 사실 본래의 기원부터 여러 시간을 통과해 온 ‘차용물’이다. 이는 가쓰시카 호쿠사이의 목판화 <가나가와 앞바다 파도 뒤(神奈川沖浪裏)>(1831)를 디지털로 도해한 것으로, 19세기 유럽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우키요에(浮世絵)의 도상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동시대 디지털 매체 시대에서 전 세계적으로 통용되는 이모지에 무려 200년 전에 생산된 일본 목판화의 도상이 포함된 데에는 어떤 사회문화사적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21세기에서 19세기로 역행한 이 이모지는 다시 작가에 의해 21세기로 소환되었으며, 매체적 측면에서는 목판화에서 디지털로, 또 콘크리트로. 확장된 즉물적 감각으로 우리를 이끈다.

이처럼 전시는 결코 가능이 불가능을 견인하는 눈앞의 절망을 비관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아니 오히려, 두 작가의 예민한 감각을 빌어 우리의 반쪽짜리 의식을 확장하기를 권유한다. 동시대 풍경의 양쪽 모두를 보여주는 방식은 모순적인 사회적 현실을 드러내는 전략이 된다. 그간 시스템에 의해 강제로 ‘화해’되고 소거되어 왔던 대립항 사이의 관계를 재구성하는 평등한 전략 말이다. 주체와 객체를, 인간과 사물을, 가능성과 불가능성 양자를 위계나 종속 없이 끌어안을 때, 모종의 시스템에 의해 감춰지고 왜곡된 세계의 모습을 온전하게 인식할 수 있다. 결국 이는 어느 한쪽에도 상처를 주지 않으며 ‘다르게’ 존재할 수 있음을 실현하는 실천이기도 하다.


* Samuel Butler(1872), 『에레혼』(한은경 역)(김영사, 2018), 278.

** Theodor W. Adorno(1951), 『미니마 모랄리아: 상처받은 삶에서 나온 성찰』(김유동 역)(도서출판 길, 2019), 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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